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존 선교사가 되고 싶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지 않는다.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가정하에 '다시 태어난다'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살기 좋은 곳이 아닌, 좋아하지 않는 곳, 살기 어려운 곳인 아마존의 선교사가 되고 싶다. 자아가 죽기 좋은 곳, 끊임없이 자신을 주님께 드리며 주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곳, 아마존에서 주님을 나누는 선교사로 태어나고 싶다.
 

오래 전, 우리 내외는 두 아이와 함께 아마존에 왔다. 이제 아이들은 모두 장성해서 아마존을 떠났고 아내는 여러 해 전 본향으로 돌아갔다. 나만 이곳에 남았다. 나는 선교사가 되리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더욱이 아마존 선교사가 되어 평생을 살아야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선교사가 된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는다.
 

군대에 입대하기 전,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근무하면 영어를 익힐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주님 제가 군대에 입대하면 카투사로 근무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때 교제 중이던 현재 아내에게도 기도를 부탁했다. 그런데 실제로 군에 입대했을 때, 카투사로 근무하게 됐다. 기도하고 잊어버렸는데 주님은 기억하시고 나를 카투사로 보내셨다. 이때 기도를 기억하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3년간 카투사로 근무하며 타문화권 선교 훈련을 받았다. 미국 군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웠고 그들의 음식을 먹고 서구의 수평적인 문화를 경험했다. 후에 선교사가 되고 난 다음 주님께서 선교사로 훈련시키고자 이렇게 인도하셨음을 감사했다.

23세에 기독교로 개종한 아내 허운석 선교사는 필자와는 다른 믿음의 소유자였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태어난 몇 년 후, 허 선교사는 내게 이혼을 제안했다. 새벽기도를 게을리 한다는 이유로 헤어지자고 했다. 이혼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그 해 1월 초 40일 금식기도를 했다. 이 금식기도로 여러 영적 경험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금식기도가 끝나 갈 즈음 마음에 이런 감동이 찾아왔다. "갈릴리와 나사렛의 가난을 배워라. 그리고 농촌에 목회자 없이 버려진 잃어버린 양떼를 돌보라."
 

금식기도가 끝난 후 목회자 없이 비어있는 농촌 교회를 찾아서 6년간 전도사로 단독 목회를 했다. 경북 금릉군 부항면 월곡리 학동, 부항중앙교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절대 필요한 선교훈련을 시키셨다. 가난한 농촌 교회 교인들을 섬기고 교제하며 나도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이들을 부끄럽지 않게 돕는 법을 배웠다.
 

농촌 교회 교인들과 말씀과 삶을 나누면서 우리는 농촌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됐다. 교인들과 함께 살다가 죽어서 양지바른 산 언덕에 묻히면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목사고시를 준비했다. 그때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선교 훈련을 다녀온 홍순범 목사를 만났다. 그는 끊임없이 인도의 비참한 모습과 복음이 필요함을 이야기해줬다.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함께 선교훈련을 갔던 신학생들 중 몇 명이 인도 선교에 헌신 했나요?"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무도 갈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홀로 누워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도에 선교사가 필요한데, 아무도 가지 않는다면 나라도 가야하지 않을까?' 그러나 곧 '왜 나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 나는 가난한 농촌에 가서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선교사 가려고 준비하는 사람들 많은데 그들이 가야지!' 그러나 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계속이어졌다. 그렇게 밤을 하얗게 새우고 피곤에 지쳤다. 새벽녘 '주님, 제가 선교사 되는 것을 바라십니까? 그럼 되어드리겠습니다'라고 마음으로 고백하고 잠이 들었다.
 

이 밤의 사건이 결국 인도에서, 아마존으로 바뀌고 아내 허 선교사의 허락을 얻어내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었다. 이윽고 1990년 가을 신촌장로교회 창립 35주년 기념 선교사로 입양되어 세계선교부 파송을 받아 아마존에서 만 29년을 지내고 있다.
 

김철기 목사/총회 파송 브라질 선교사